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탁통치 오보사건 (문단 편집) === 좌파의 지지운동 === 반면 당시 [[사회주의]] 계열은 보도를 접하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공산당이 아무리 [[내셔널리즘]]을 배격한다지만 신생 독립국이었던 조선의 정당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서 [[신탁통치]]이지, 패망한 일제 대신 미국, 영국, 소련에게 사실상 식민지배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런 위기감을 느낀 건 [[박헌영]], [[리승엽]] 등 당의 [[높으신 분들]]조차 예외가 아니라서, '''보도 직후에는 [[조선공산당]]에서도 이 신탁통치안 놓고 정식으로 반대성명을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멘탈을 회복한 후 공산당 수뇌부 그들 나름대로 철저하게 분석해 본 결과 강대국들의 결정은 일제와 같은 식민통치가 아니라 조선만의 임시정부 수립을 목표에 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공산당은 1946년 1월 1일 신년을 기해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3상 회의 지지로 입장을 선회했고[[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2627|#]] 일부 중도 좌파 민족주의 세력이 좌파 노선을 이탈했다. 한편 이는 우익 쪽에 의해 '찬탁'으로 치부되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장은 남한의 찬탁 운동이 소련의 지령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단, 박헌영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그가 찬탁으로 선회하게 되었다고 처음 알려진 시기인 1946년 1월 초 뉴욕타임즈의 존스턴 기자와의 기자회견에서 '조선이 소련연방에 편입되길 바란다'고 발언한 보도에서 문제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2&aid=0001969064|되었다.]] 이 기사는 사실관계를 잘못 전달한 왜곡편집으로 매도당한 측면이 [[http://media.daum.net/culture/book/newsview?newsid=20130522113920457|있다.]]] 하지만 [[김일성]]과 [[김두봉]] 같은 북조선 공산당 측은 [[러시아어]] 합의문의 'опека(후견(tutelage)/보호감독/신탁통치라는 중의적 의미가 있음 - [[http://rudic.naver.com/#entry/249975|사전]])'이란 단어를 이용해서 신탁통치가 아닌 후견제라고 주장했다.[* 이는 [[영어]]문에서 'trusteeship(신탁통치)'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였다.] 이때부터 사회주의 계열은 반공 진영으로부터 '소련의 지령에 놀아난 매국노'라고 대차게 까이게 되었고 남한 내의 지지기반은 크게 위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